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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관광

백제와 천주교의 역사가 아로 새겨진 익산여행

도시와 농촌이 함께 만들어가는 다이로움 농촌여행이 되길 바랍니다

  • 조해영가옥 입구 좌측에 위치한 비석

    김육불망비

    조선 효종 10년(1659)에 세워졌는데, 호남지역의 대동법 실시를 여러차례 건의하고 유언으로까지 임금에게 관한 그 고마움을 표시한 일종의 선정비이다.

    소재지전북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 473

    문의처063-859-5791

    • 문화재구분익산시향토유적
    • 문화재지정번호익산시 향토유적 제11호

    조해영가옥 입구 좌측에 위치한 비석은 호남지역의 대동법 실시를 여러 차례 건의하고 유언으로까지 임금에게 간절하게 당부한 김육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한 일종의 선정비이다.

    조해영 가옥 안에 있는 김육불망비는 조선 효종 10년(1659)에 세워졌는데, 호남지역의 대동법 실시를 여러차례 건의하고 유언으로까지 임금에게 관한 그 고마움을 표시한 일종의 선정비이다. 기단은 화강암이며 비신과 이수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이수에는 두 마리의 이무기가 여의주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고, 주변을 이무기의 몸체가 감싸고 있다. 이수 뒷면에는 국화무늬와 주변에 구름무늬가 양각되어 있다.

  •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86호 용안향교 대성전

    용안향교 대성전

    1927년경 불이 나 대성전만 남고 나머지의 모든 건물들이 불에 타버리게 되므로 그 자리에 용안초등학교가 세워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1961년 이곳 용안향교를 출입하는 유림들과 지방민들의 성금으로 현재의 명륜당을 다시 현 위치에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소재지전북 익산시 용안면 교동리 163-1

    문의처063-861-3898

    • 문화재구분지방지정 문화재
    • 문화재지정번호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86호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86호 용안향교 대성전

    익산시 용안면 교동리에 자리하고 있는 용안향교는 용안 초등학교 바로 뒤쪽 북동쪽에 위치해 있다. 용안향교는 소설위(小說位)로 대성전에는 중국의 다섯 성인과 4현인, 그리고 우리나라의 18현인을 배향하고 있다. 이 향교의 중앙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인 대성전이 주위에 담장을 하고 자리하고 있다. 대성전 오른쪽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인 명륜당과 정면 4칸의 교직사가 있다. 또한 대성전 왼편에 정면 3칸의 현재는 충효관으로 이름이 바뀐 전사재가 일직선 위에 나란히 용안초등학교 교정을 한눈에 내려 보고 있다.

    용안향교의 역사

    전하여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원래 용안향교는 고려시대 공양왕 3년(1391년)에 현재 용안향교가 위치한 곳에서 약 600m쯤 떨어진 지금의 용안면 중신리에 처음 세워졌던 것을 조선 태종 16년(1416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세운 것이라 한다. 이때 명륜당과 전사재, 동재, 서재, 양사재, 사마재 등의 건물은 현재의 대성전 아래 용안초등학교 교사가 있는 곳에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1927년경 불이 나 대성전만 남고 나머지의 모든 건물들이 불에 타버리게 되므로 그 자리에 용안초등학교가 세워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1961년 이곳 용안향교를 출입하는 유림들과 지방민들의 성금으로 현재의 명륜당을 다시 현 위치에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전해오는 유물로는 제사 때 쓰던 제기들과 제복이 그대로 구비되어 있지만 이것은 대부분 1927년 이후 마련된 것들이다.

  • 익산시 함라면 소재에 있는 향교

    함열향교 대성전

    조선 세종 19년(1437)에 대성전이 창건되었으며 성종 22년(1491)에 명륜당이 신축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에 불에 타 버렸고, 영조 때 중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소재지전북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 579

    문의처063-856-8947

    • 문화재구분지방지정 문화재
    • 문화재지정번호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85호

    익산시 함라면 소재에 있는 향교로서 대성전을 비롯 영소전, 난심재, 교직사, 동재, 서재, 외산문, 내산문 등이 있다.

    함열향교는 조선 세종 19년(1437)에 대성전이 창건되었으며 성종 22년(1491)에 명륜당이 신축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에 불에 타 버렸고, 영조 때 중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대성전에 중국의 다섯 성인과 4명의 현인, 그리고 우리나라의 18현인을 배향하고 있다.

  • 여산의 동남쪽 외로운 곳에 있는 여산향교

    여산향교 대성전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들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소재지전북 익산시 여산면 여산리 101-1

    문의처063-835-7634

    • 문화재구분지방지정 문화재
    • 문화재지정번호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83호

    여산의 동남쪽 외로운 곳에 있는 여산향교

    여산향교(礪山鄕校)는 여산에서 약 2km쯤 떨어진 여산면 여산리의 산골짜기에 남향하여 위치하고 있다.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들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이 여산향교는 조선 태종 3년(1403)에 창건되었다. 그 후 선조 때 일어난 임지왜란 당시에 불에 타 버렸으나 이곳 유림들에 의해 후에 다시 중건되었다. 여산향교와 같은 중설위(中設位)로 대성전에는 중국의 다섯 성인과 10명의 철인, 그리고 6명의 현인을 배향하고 우리나라의 18현인을 역시 배향하고 있다. 이 향교의 가장 윗부분에는 3칸으로 된 대성전이 있으며, 그 아래 왼편으로 서무가 있고, 오른편으로는 동무가 각각 3칸의 건물로 되어 있다. 내삼문 아래에는 정면 5칸의 명륜당이 있으며, 오른쪽에 동재, 왼편에는 서재가 각각 정면 3칸을 이루고 있다. 또 이들 건물 아래로 사마재와 양사재 그리고 전사청(典祀廳)이 각각 정면 3칸을 이루고 있다.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83호 여산향교 대성전

    여산향교 대성전은 1984년 4월 1일에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83호로 지정되었다. 대성전의 규모는 앞면 3칸 반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옆면에는 바람막이 방풍판을 달았다. 대성전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한 그 제자와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 때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현재는 교육 기능이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 천주교 박해의 현장 전북 익산 여산숲정이성지

    여산 숲정이 순교성지

    호남의 관문으로 일찍이 천주교가 전래되어 수많은 신앙 공동체와 순교자들을 배출하였다. 병인박해가 일어났을 당시에 금산, 진산, 고산에서 잡혀 온 신자들이 순교한 곳이며 기록상으로만 22명이 순교했다.

    소재지전북 익산시 여산면 여산리 295

    문의처063-838-8761

    • 문화재구분지방지정 문화재
    • 문화재지정번호전라북도 기념물 제125호

    천주교 박해의 현장 전북 익산 여산숲정이성지

    전북 익산시 여산면 여산리에 있는 천주교 순교 성지이다. 이곳은 호남의 관문으로 일찍이 천주교가 전래되어 수많은 신앙 공동체와 순교자들을 배출하였다. 병인박해가 일어났을 당시에 금산, 진산, 고산에서 잡혀 온 신자들이 순교한 곳이며 기록상으로만 22명이 순교했다. ‘여산 순교 성지’라고 쓰인 대형 돌판이 있으며 그 안쪽으로 백지사 기념비가 서 있다. 순교자들의 무덤은 천호산 기슭 천호 공소 부근에 자리하고 있다. 주변에 여산성지, 백지사지터, 여산동헌과 척화비등이 있어 우리나라 근대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이며 천주교 순례자들의 방문이 잇따르고 있다.

    여산 지역의 천주교 순교사건

    이곳 여산 성지는 1868(무진)년 박해 때의 순교성지로 전주 교구 제2의 성지이다. 1866년 대원군의 쇄국 정책과 천주교 말살 정책으로 시작된 박해는 1868년에 이르러 가장 치열하였다. 당시 고산 넓은 바위에서는 많은 신자들이 잡혀와 17명이 처형되었는데 그중에서 지도자인 김성첨(토마스)의 가족은 6명이 순교하였다. 이 순교자들은 숲정이와 장터에서 참수형 혹은 교수형으로 처형되었고 동헌(지금의 경노당) 뜰에서는 얼굴에 물을 뿌리고 백지를 겹겹이 덮어 질식시켜 죽이는 백지사(白紙死) 형이 집행되었다. 옛 동헌 뜰에는 당시의 박해 사실을 증명하듯이 대원군의 척화비가 서있다. 병인박해 당시 여산 지역의 천주교 순교사건은 조선 후기 천주교 전라도 전래과정을 중심으로 한 천주교 역사뿐 아니라 조선 후기 전라도 지역사에도 의미 있는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 민간신앙의 전통을 알 수 있는 성당면의 은행나무

    성당면의 은행나무

    무성한 줄기와 함께 아름다운 모양을 자랑하는 이 은행나무는 오늘도 마을의 안녕과 무사함을 기원하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인근에는 같은 황룡산 줄기에 아주 오래된 느티나무 두 그루가 더 있어 은행나무와 함께 성황당으로 활용되었었다.

    소재지전북 익산시 성당면 성당리 산 2

    문의처063-859-5797

    • 문화재구분지방지정 문화재
    • 문화재지정번호전라북도기념물 제109호

    민간신앙의 전통을 알 수 있는 성당면의 은행나무

    2000년 11월 28일 전라북도기념물 제109호로 지정되었다. 이 은행나무의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성포 별신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조선시대인 1662년(현종 3) 조세미(租稅米)의 저장과 운반을 위해 성당창(聖堂倉)이 세워져 마을의 안녕과 풍어의 기원, 조운선의 무사 항해를 기원한 별신제가 행해졌다. 1895년(고종 32) 성당창의 조창(漕倉)이 폐쇄되고 별신제를 행하던 순풍당이 무너지자 별신제 대신 마을의 공터에 있는 은행나무와 느티나무에 치성을 올리는 당산제가 행해졌다. 성당면의 은행나무는 마을의 안녕과 풍년, 풍어, 조운선의 순항을 기원하기 위한 당산제(堂山祭)의 당목이다. 높이 18m, 흉고둘레 6m 정도로 익산지역의 은행나무 가운데 가장 크다. 은행나무의 크기로 보아 조선시대 성당창이 설치된 1662년 이전에 심은 나무로 수령(樹齡)은 400∼500년 정도로 추정된다. 나무 자체의 역사성과 민간신앙의 전통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주민들의 사랑 속에서 보호수 역할

    무성한 줄기와 함께 아름다운 모양을 자랑하는 이 은행나무는 오늘도 마을의 안녕과 무사함을 기원하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인근에는 같은 황룡산 줄기에 아주 오래된 느티나무 두 그루가 더 있어 은행나무와 함께 성황당으로 활용되었었다. 또 느티나무 바로 밑에는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한풍정이라는 현판을 가진 정자도 있다. 마을의 언덕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포구는 항상 기다림과 기원의 장소였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만선으로 돌아온 다음날에는 오수를 즐기는 장소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물결처럼 밀려오는 한없는 그리움을 간직한 망부의 눈물받이였음도 짐작할 수 있다.

  • 미륵사보다 앞서 창건된 사찰

    사자사지

    현재는 사자암으로써 석가모니를 모신 대웅전과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채 등이 있다.

    소재지전북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 609-1

    문의처063-859-5875

    • 문화재구분지방지정 문화재
    • 문화재지정번호전라북도기념물 제104호

    사자사는 미륵사보다 앞서 창건된 사찰로서 백제 의 무왕과 선화비가 이 사자사로 행차하던 중 용화산 아래 연못에서 미륵삼존불이 나타나자 이를 계기로 ‘미륵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사자사지는 미륵산 정상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는 사자암으로써 석가모니를 모신 대웅전과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채 등이 있다.삼국유사 무왕조에 따르면 무왕과 왕비가‘사자사’에 행차하던 중 용화산 아래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나자, 이를 계기로 미륵사를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사자사는 백제 무왕과 왕비가 불공을 드렸던 곳이며, 신통력이 뛰어났던 승려인 지명법사가 거주했던 사찰로 전해진다. 사자암은 미륵사 창건의 계기를 마련해 준 점에서 백제 불교사상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한편 1993년 사자암 대웅전 해체 복원 중 삼국시대(백제) 기와와 더불어‘지치 2년(至治二年) 사자사조와(師子寺造瓦)’라는 명문이 새겨진 암막새가 출토됨에 따라 사자암이 삼국유사에 전해져 오는 사자사임이 확인되었다.

  • 해주오씨(海州吳氏) 오충신(五忠臣)의 유적

    삼세오충열사

    3대에 걸쳐 나라를 위해 순절한 해주오씨(海州吳氏) 오충신(五忠臣)의 유적이 모여 있는 곳이다.

    소재지전라북도 익산시 용안면 현내로 468

    문의처063-859-5791

    • 문화재구분지방지정 문화재
    • 문화재지정번호전라북도 기념물 제61호

    전라북도 기념물 제61호 삼세오충열사

    삼세오충열사는 전북 익산시 용안면 중신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1982년 8월 30일에 전라북도 기념물 제61호로 지정되었다.
    삼세오충열사는 3대에 걸쳐 나라를 위해 순절한 해주오씨(海州吳氏) 오충신(五忠臣)의 유적이 모여 있는 곳이다. 원래는 오응정(吳應鼎)과 그의 아들 욱(稶)과 직(稷), 그리고 직의 아들 방언(邦彦)을 배향하여 사충사(四忠祠)라 하였으나 근년에 오응정의 아들 동량(東亮)을 추향하여 오충열사(五忠烈祠)라 부르고 있다. 오응정(1548∼1597)은 전라도 용안현 출신으로 자는 문중(文中), 호는 완월당(翫月堂)이다. 조선 선조 7년(1574년)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에서 치적(治積)을 쌓던 중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순천부사 겸 총 병부 문안사(順天府使兼總兵府問安使) 전라도 우방어사(全羅道右防禦使)가 되어 어모장군(禦侮將軍) 욱, 동량과 더불어 남원성(南原城) 전투에 참전하여 분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게 되자 화약더미 속에서 세 부자가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오응정의 차남 오직(1574∼1619)은 광해군 때 도원수(都元帥) 강홍립(康弘立) 막하의 우영천총(右營千摠)으로 요동심하 전투에 출전하였으나 강홍립이 후금군에 항복하자 격분하여 부차(富車)에서 적과 싸우다 온 몸에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 그의 아들 방언(1588∼1637)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적과 싸우다 인조대에 삼전도 굴욕을 당하자 남한강에 투신자살하였다. 이를 기리기 위해 조선 숙종 7년(1681)에 충열사를 세웠다.

    해주오씨(海州吳氏) 오충신(五忠臣)의 유적

    관리 사무소를 지나면 광장입구에는 정문인 충신문이 있다. 충신문을 지나 올림픽기념 숲을 걷다보면 외삼문인 복절문에 이르고 복절문 좌측에는 기념관인 영국관이 있다. 내삼문인 장의문을 지나면 본사우인 삼세오충열사에 이른다. 여기에는 중앙에 오응정, 좌측에 동량과 욱, 우측에 직과 방언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삼세오충열사의 현판은 여산 권갑석 선생이 쓰셨다. 삼세오충열사를 나와 우측으로 가면 신도비와 오응정의 묘가 있고 정려각이 있다. 최근에는 모충제를 건립하였다. 충신문의 우측으로 가면 오충신의 묘와 오응운, 오응태, 오하몽, 오석근, 오식 등 직계선조의 묘가 있고 오영우, 오사고, 오희, 오사만, 오영수 등을 모신 삼신단이 있다.

  • 국문학자이자 시조작가인 가람 이병기 선생의 생가

    이병기선생생가

    생가는 조선 말기 건축양식을 따른 것으로 안채와 사랑채, 모정과 모정 앞쪽에 작은 연못 2곳이 있다. 안채는 호남지방에서 보기 드문‘ㄱ’자집으로 잡석을 이용한 축대 위에 초석을 사용해서 비교적 높게 지었다.

    소재지전북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 573

    문의처063-859-5789

    • 문화재구분지방지정 문화재
    • 문화재지정번호전라북도 기념물 제6호

    국문학자이며 시조 작가인 가람 이병기(1891~1968)선생이 태어나 살던 곳이다. 조선 말기 선비의 가옥 배치를 따르고 있는데 안채, 사랑채, 헛간, 고방채, 정자 등이 남아 있다. 소박한 안채와 사랑채, 안담한 정자와 연못에서 선비 가옥의 면모를 잘 살필 수 있다.

    국문학자이자 시조작가인 가람 이병기 선생(1891~1968년)의 생가이며, 그의 가족이 거주한 목조 초가집으로 가람선생이 수우재(守愚齋)라 명명하였다. 생가는 조부에 의해서 건립되었다. 이곳에서 1891년 선생은 태어났으며, 1968년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생가는 조선 말기 건축양식을 따른 것으로 안채와 사랑채, 모정과 모정 앞쪽에 작은 연못 2곳이 있다. 안채는 호남지방에서 보기 드문‘ㄱ’자집으로 잡석을 이용한 축대 위에 초석을 사용해서 비교적 높게 지었다.

  • 조선 후기 불상 양식

    익산혜봉원 목조석가여래삼존상

    혜봉원의 법당인 불이정사(不二精舍)에 삼존상이 모셔져 있는데, 석가여래좌상(釋迦如來坐像)과 보현보살상(普賢菩薩像)이다. 불이정사의 삼존상은 석가여래좌상을 가운데 두고 양옆에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이 자리하고 있는데, 문수보살(文殊菩薩)은 잃어버려 최근에 만들어 놓은 것이다.

    소재지전북 익산시 모현동1가 719-16

    문의처063-855-5091

    • 문화재구분지방지정 문화재
    • 문화재지정번호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90호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90호 혜봉원 목조석가여래삼존상

    혜봉원 목조석가여래삼존상은 2001년 9월 21일에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90호로 지정되었다. 1894년(고종 31)에 삼곤사(三坤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는데 1955년에 지금의 혜봉원이란 이름으로 바뀐 것으로 전해진다. 혜봉원의 법당인 불이정사(不二精舍)에 삼존상이 모셔져 있는데, 석가여래좌상(釋迦如來坐像)과 보현보살상(普賢菩薩像)이다. 불이정사의 삼존상은 석가여래좌상을 가운데 두고 양옆에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이 자리하고 있는데, 문수보살(文殊菩薩)은 잃어버려 최근에 만들어 놓은 것이다.

    조선 후기 불상 양식을 잘 표현한 혜봉원 목조석가여래삼존상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석가여래좌상은 작은 소라모양의 머리카락을 붙여 놓은 머리 형태를 하고 있으며 그 정수리 부분에는 상투 모양을 한 육계가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손끝이 땅을 향한 손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악귀를 물리친다는 의미의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다. 두텁게 표현된 옷자락은 양어깨를 모두 감싸고 흘러 내려 무릎까지 덮고 있다. 보현보살상은 고개를 약간 앞으로 숙인 자세를 하고 있다. 머리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석가여래좌상과 비슷한 모습이다. 오른손은 어깨 부근으로 올려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으며, 왼손은 왼쪽 무릎 위에 놓고 역시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다. 화려한 보관 아래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양어깨까지 내려와 있다. 이 삼존상은 조선 숙종 38년(1712)에 부안의 도솔암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특히 보현보살의 경우 보살상이 흔히 연꽃가지를 들고 있는데 비해 불상과 같은 손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불상이 만들어진 사연을 알 수 있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조선 후기 불상 양식을 잘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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