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135호 유계신도비 및 남원윤씨절행정판
유계신도비는 성당면 와초리 상와부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종 9년(1668년)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글을 지었는데, 서거 후 94년만인 영조 33년(1757년)에 건립되었다. 좌대는 높이 39㎝, 두께 120㎝, 폭 166㎝이며, 비신은 높이 231.5㎝, 두께 45㎝, 폭 85㎝이며, 관석은 높이 50㎝, 두께 90㎝, 폭 120㎝이다.
유계 선생의 공적을 담고 있는 신도비와 남원윤씨절행정판
유계(1607∼1664)는 김장생의 제자로 그에게서 성리학을 배웠으며, 예학과 사학에도 능하여 송시열·송준길 등과 함께 충청 유림의 5현(賢) 중 한 분이다. 인조 11년(1633)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의 관리로 벼슬을 시작하였으며,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는 청을 배척하자는 척화론을 주장하였다가 양국이 화해를 하는 바람에 유배를 당하였다.
인조 17년(1639) 유배에서 풀려나 관직을 버리고 금산에 머무르며 학문에 전념하였고, 인조 24년(1646) 무안현감이 되었다. 효종 10년(1659)에는 시강원의 문학으로 등용되었으며, 그 후 여러 관직을 두루 맡아보게 되었다. 효종이 죽고 복상문제가 일어나자 윤선도 등이 주장하는 3년설을 반대하며 왕에게 글을 올리어 그들을 유배시키거나 낮은 벼슬로 좌천시키기도 하였다. 이후 이조참판에까지 올랐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저서로는 『시남집(市南集)』,『여사제강(麗史提綱)』,『가례원류(家禮源流)』등이 있다.
비각 안에 있는 유계신도비는 낮은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모습이다. 비문은 현종 9년(1688) 우암 송시열이 지은 것으로, 90년이 지난 영조 33년(1757)에 비문을 새겨 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