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최근 본 상품

익산관광

백제와 천주교의 역사가 아로 새겨진 익산여행

도시와 농촌이 함께 만들어가는 다이로움 농촌여행이 되길 바랍니다

  • 마한시대의 문화를 확인할 수 있는 유적

    영등동유적

    전라북도 익산시 영등동 814번지는 영등시민공원이다. 여기에 커다란 무덤 형태의 구릉이 있는데 2002년 5월 30일에 익산시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하여 영등동유적이라 부른다.

    소재지전북 익산시 영등동 814

    문의처063-859-5791

    • 문화재구분익산시향토유적
    • 문화재지정번호익산시 향토유적 제1호

    전라북도 익산시 영등동 814번지는 영등시민공원이다. 여기에 커다란 무덤 형태의 구릉이 있는데 2002년 5월 30일에 익산시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하여 영등동유적이라 부른다. 영등동택지개발 과정에서 1995년부터 1996년까지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청동기시대 장방형집터 3기와 원형집터 2기 등 총 5기의 집터가 남아 있던 곳이다.

    익산시 향토유적 제1호 영등동유적

    전라북도 익산시 영등동 814번지는 영등시민공원이다. 공원 안에는 2002년 5월 30일에 익산시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된 영등동유적이 자리해 있다. 영등동유적지는 영등동택지개발 과정에서 1995년부터 1996년까지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청동기시대 장방형집터 3기와 원형집터 2기 등 총 5기의 집터가 남아 있던 곳이다. 이중에서 장방형집터 1기는 본래의 영등유적지에 있었고, 나머지 4기는 조금 떨어진 주변지역에서 이전해온 것들이다. 청동기시대 주거지는 평면 형태에 따라 장방형, 방형, 원형으로 구분되는데 장방형 주거지는 전기무문토기시대에 해당하는 것으로 내부에 노지가 설치되었고, 방형과 원형 주거지는 중기무문토기시대의 송국리형(松菊里型) 주거지와 같은 유형이다.

    마한시대의 문화를 확인할 수 있는 유적

    영등동 택지조성 전에 실시한 지표조사에서 마제석부와 무문토기편, 화살촉과 돌도끼 등이 수습되었으며, 1995년부터 1996년까지 3차에 걸쳐 조사한 결과 3개 지역에서 청동기시대주거지 장방형집터 7기, 방형집터 5기, 원형집터 12기와 원삼국 마한시대의 주구묘 5기가 조사되었다. 영등동유적에서 마한시대의 수장급 묘로 보이는 주구묘 1구가 조사됨으로써, 익산지역 마한시대의 문화를 확인할 수 있는 유적이 되었다.

  • 근대시기의 한옥

    조해영가옥

    조해영 가옥은 여러 채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변형된 모습의 문간채만 잔존해 있다.

    소재지전북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 473

    문의처063-856-0222

    • 문화재구분지방지정 문화재
    • 문화재지정번호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1호

    1918년에 축조된 건축물로서 김병순고택, 이배원가옥과 함께 함라 3부잣집에 해당되는 가옥으로서, 근대시기의 한옥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해영 가옥은 여러 채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변형된 모습의 문간채만 잔존해 있다. 건축연대는 안채가 1918년, 별채가 1922년 또는 그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안채와 사랑채 두 건물은 남북으로 길게 되어 있으며 서로 평행하게 되어 있다. 안채는 남쪽을 보고 있으며 별채는 서쪽을 보고 있다.안채는‘ㄱ’자형 평면에 누마루가 더해진‘乙’자형 건물이다. 후원의 별채는 일본식 2층 건물로 외관은 정면 4칸에 측면 2칸이다. 별채 내부는 외부 기둥 열과 상관없이 기둥을 세워 방과 마루를 한 칸씩 구획하였으며 주위에 툇마루를 돌렸다. 안채와 별채 사이에는 두 공간 을 구분하는 십장생벽돌꽃담이 있는데 경복궁 대조전 뒤뜰의 굴뚝꽃담을 모방해서 만든 것이다. 안채 옆에는 문간채가 있으며 문간채는 대청·방·광으로 되어 있다.

  • 오랜 역사를 지닌 고찰, 자명사

    자명사 대웅전 목조여래좌상

    기와, 토기편 등의 유물과 경내의 고목을 통해서 절이 오랜 역사를 지닌 고찰임을 짐작할 수 있다.

    소재지전북 익산시 용안면 법성리 279

    문의처63-861-3542

    • 문화재구분익산시향토유적
    • 문화재지정번호익산시 향토유적 제3호

    절의 역사에 대해서는 사찰의 동쪽 입구에 위치한 1944년에 세운 사적비 내용이 현재로서 유일 하다. 이를 통해 보면, 자명사(自鳴寺)는 신라시대인 678년(문무왕 18)에 선설대사가 창건했는데 당시 이름은 자웅사(自雄寺)였다. 그 뒤 조선시대 중기에 당시의 권세가인 민인재(閔隣宰)가 용안읍에서 살 때 자웅사에서 소 우는 소리가 읍내에 가득 퍼지는 꿈을 꾸고는 기이하게 생각하고 절을 ‘자명사’로 고쳤다고 한다. 그 뒤 기혜, 신봉, 성암스님 등이 이어서 중수하였고, 근대에 와서는 1943년에 진명대사가 중건을 하면서 절 모습을 일신했다.
    법화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여 법당을 1991년에 중수하고 요사도 고쳐 지었다. 현재 사찰 경내에서 통일 신라 시대까지 소급될 수 있는 유물은 전하고 있지 않지만, 주변에서 발견되는 기와, 토기편 등의 유물과 경내의 고목을 통해서 절이 오랜 역사를 지닌 고찰임을 짐작할 수 있다.

  • 단정한 모습으로 전통적 기법을 유지하고 있는 아석정

    아석정

    금마면 서고도리 서계마을의 산 중턱에 위치한다. 1934년 소진홍(蘇鎭洪)이 선조 대대로 살아오던 자리에 터를 닦아 건립하였다. 뒤쪽은 숲으로 이어지고 앞으로는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소재지전북 익산시 금마면 아리랑로 9-34

    문의처063-859-5791

    • 문화재구분익산시향토유적
    • 문화재지정번호익산시 향토유적 제4호

    익산시 향토유적 제4호 아석정

    아석정은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에 있는 정자이며 2002년 5월 30일에 익산시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되었다. 금마면 서고도리 서계마을의 산 중턱에 위치한다. 1934년 소진홍(蘇鎭洪)이 선조 대대로 살아오던 자리에 터를 닦아 건립하였다. 뒤쪽은 숲으로 이어지고 앞으로는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단정한 모습으로 전통적 기법을 유지하고 있는 아석정

    아석정은 산 중턱에 터를 고르고 거칠게 치석한 장대석으로 낮은 기단을 조성하였다. 기단 상면은 현재 시멘트로 마감되어 있으며 그 위에 한자 높이의 민흘림 원형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정면 3간, 측면 2간의 정자를 남서향(艮坐坤向)으로 구성했다. 정면은 세 간 모두 6자(1820cm)로서 주간이 일정하며, 측면의 주간은 5자(1520cm) 길이이다. 마루는 우물마루로 1m 높이로 비교적 높게 구성하였는데 기둥뿌리와 마루를 구성하는 멍에 사이에 人자형으로 기둥마다 가새를 설치하였다. 마루 주위는 평난간을 시설하였다. 난간의 높이는 한자 남짓 되며 전면은 아자형으로 나머지 삼면은 안상을 뚫은 궁창으로 머름을 꾸미고 있다. 공포는 초익공구조이다. 쇠서 전면은 직절하였고 안쪽은 사절하여 보아지 역할을 하는 일반적인 구조이다. 주간은 매 칸마다 창방 위에 4개의 소로를 배설하여 장여를 받게 했다. 도리는 굴도리인데 기둥마다 도리와 기둥머리 사이에 두 개의 원형철근 꺾쇠를 V자형으로 박아놓아 도리를 고정하고 있다. 가구는 전후 평주에 두 개의 대들보를 걸고 대들보 위에는 종보가 거의 맞닿도록 충량과 반턱맞춤으로 놓여 있고 그 위에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는 5량식 구조이다. 종도리 밑 상량대에는‘세재갑술4월13일오시입주동일미시상량(歲在甲戌四月十三日午時立柱同日未時上樑) 산수우락풍월위정(山水寓樂風月爲情)’이란 상량문이 남아 있어 1934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대들보에 직각으로 걸려 있는 충량 위에는 외기(外機)를 짜고 지붕을 구성했는데, 겹처마 팔작집으로 근래에 한식 오지기와로 번와하여 상태가 양호하다. 전체적으로 단정한 모습이며 목가구의 기법에 있어서도 비교적 전통적 기법을 유지하고 있다.

  • 현천저수지를 바라보는 수덕정

    수덕정

    조선 고종 때의 문신 농은(農隱) 송기인(宋基仁)의 뜻을 받들어 1938년에 건립하였다. 여산면 태성리 화산(華山) 중턱, 남서쪽으로 현천저수지를 바라보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소재지전북 익산시 여산면 태성1길 199

    문의처063-859-5791

    • 문화재구분익산시향토유적
    • 문화재지정번호익산시 향토유적 제5호

    현천저수지를 바라보는 수덕정

    수덕정은 2002년 5월 30일 익산시 향토유적 제5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고종 때의 문신 농은(農隱) 송기인(宋基仁)의 뜻을 받들어 1938년에 건립하였다. 여산면 태성리 화산(華山) 중턱, 남서쪽으로 현천저수지를 바라보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익산시 향토유적 제5호 수덕정

    초석은 대리석을 흘림기법으로 정교하게 다듬은 높이 67㎝의 원형 장초석이며 기둥은 두리기둥이다. 평면은 정면 2간, 측면 2간의 정방형이다. 주간은 6자(1820mm)로서 동일하다. 마루는 우물마루로서 지면에서 90여cm 떨어져 있고 주위에는 난간을 시설했다. 난간은 띠장과 지방 사이에 몇 개의 각재를 끼워 간단히 구성했다. 전면은 출입을 위해 난간이 끊어져 있고 그 앞에 두 단의 콘크리트 계단이 각각 놓여 있다. 공포의 구조는 기둥 머리에서 창방과 익공쇠서가 직교하며 쇠서는 주두를 물고 있는 초익공 구조이다. 쇠서의 전면은 직절하였고 안쪽은 사절하여 대들보를 받게 하는 보편적인 구조이다. 주간은 소로수장집과 같이 4개의 소로를 놓아 장여를 받게 했다. 가구는 가운데 기둥에서 전후로 긴보를 가로지르고 그 위에 측면 평주에서 두 개의 부재를 충량처럼 걸었다. 그 상부에 정(井)자형 외기를 짜고 중도리를 걸었으며 그 위에 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게 함으로써 팔작지붕을 구성했다. 종도리 하부의 장여와 뜬창방 사이에는 소로를 배설하였고 뜬 창방 전면에 상량문을 기록했다.

  • 쇄국정책의 산물, 척화비

    여산척화비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를 하자는 것이니, 화해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소재지전북 익산시 여산면 동헌길 13

    문의처063-859-5791

    • 문화재구분익산시향토유적
    • 문화재지정번호익산시 향토유적 제7호

    익산시 향토유적 제7호 여산척화비

    여산척화비는 2002년 5월 30일에 익산시 향토유적 제7호로 지정되었다. 척화비는 대원군이 병인양요(1866년) 때 척화의지를 발표하고 신미양요(1871년) 이후 백성들에게 서양에 대한 강한 항전의식을 심어주기 위하여 서울 종로를 비롯하여 동래, 부산진, 함양, 경주 등에 세운 것이다. 그러나 1882년 임오군란 이후 대원군이 실각하자 일본공사관의 요구에 의하여 모두 철거되어 인근 땅에 묻었다가 1915년 이후에 발견되었다. 여산척화비는 인근 초등학교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며 이를 현재의 여산동헌으로 이전하였다.
    여산동헌 건물 옆으로는 여산에 부임하여 온 여러 관리의 선정비(善政碑)와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그리고 여산 초등학교 주변에서 옮겨온 척화비(斥和碑) 등 9기의 비가 진열되어 있다.
    척화비는 비문이 선명하다. 서체는 해서체(楷書)이며, 크기는 높이 114cm, 폭 46cm, 두께 9cm이고 재료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통비(通碑)이다.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를 하자는 것이니, 화해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쇄국정책의 산물, 척화비

    조선왕조는 1860년대를 맞이하여 서구 열강의 침투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외세의 침투로 인한 자구책으로 마련된 것이 대원군의 쇄국정책(鎖國政策)이었으며 이것의 산물로 나타난 것이 전국의 주요 지점에 세워진 척화비라 하겠다. 이러한 척사론(斥邪論)은 조선 말기에 활발히 전개되었던 민족사상의 큰 줄기였던 바 19세기 중엽부터 일어나기 시작하여 조선왕조가 종말을 고하게 되는 20세기 초까지 면면히 이어져 왔던 것이다. 이러한 열강에 대한 위기의식 속에서 조선왕조의 유지를 위하여 나타난 것이 대원군의 쇄국정책이었다. 1860년대를 필두로 하여 밀려온 열강들의 통상 요구는 서양문명이라는 이질적인 요소에 대하여는 문외한이었으며, 더구나 봉건적 전제체제에 익숙한 조선왕조에게는 커다란 도전이었으며 무거운 짐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라는 대혼란을 겪은 결과, 세계정세에 어두운 대원군은 더욱더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어 급기야는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이라는 척화비문을 반포(頒布)하고 더욱더 쇄국양이정책을 고집하였던 것이다.

  • 안정감이 있고 균형 잡힌 불신

    문수사 목조여래좌상

    나무로 된 불상에 칠을 하였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탈락되었으나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다. 머리는 오른쪽으로 틀어 소라모양을 한 나발이며, 부처님의 정수리에 볼록 튀어나온 부분인 육계는 조금 낮게 표현되어 있다. 사각형의 넓적한 얼굴과 오뚝한 콧날, 넓적한 콧망울, 굳게 다문 입 등은 조선후기 17세기 불상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소재지전북 익산시 여산면 천호산길 140

    문의처063-836-9643

    • 문화재구분익산시향토유적
    • 문화재지정번호익산시 향토유적 제9호

    여산면 호산리 69번지에 있는 문수사의 목조여래좌상 1구는 2002년 12월 14일에 익산시 향토유적 제9호로 지정되었다. 목조여래좌상은 나무로 된 불상에 칠을 하였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탈락되었으나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다. 머리는 오른쪽으로 틀어 소라모양을 한 나발이며, 부처님의 정수리에 볼록 튀어나온 부분인 육계는 조금 낮게 표현되어 있다. 사각형의 넓적한 얼굴과 오뚝한 콧날, 넓적한 콧망울, 굳게 다문 입 등은 조선후기 17세기 불상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익산시 향토유적 제9호 문수사 대웅전 목조여래좌상

    여산면 호산리 69번지에 있는 문수사의 목조여래좌상 1구는 2002년 12월 14일에 익산시 향토유적 제9호로 지정되었다. 이는 사찰 문수사의 소유다. 문수사는 해발 500m의 천호산 지맥 서측사면 중턱에 위치한 사찰로 주변의 백련암과 백운사와 더불어 3대 보살을 신앙하는 사찰로 전해오고 있다. 여래좌상은 극락전에 봉안된 삼존불 중 본존불로서, 원래는 대웅전에 봉안하였으나 극락전을 새로 지어 모시게 되었다. 좌우에 있는 협시보살은 최근에 제작한 것이다.

    안정감이 있고 균형 잡힌 불신

    목조여래좌상은 나무로 된 불상에 칠을 하였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탈락되었으나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다. 머리는 오른쪽으로 틀어 소라모양을 한 나발이며, 부처님의 정수리에 볼록 튀어나온 부분인 육계는 조금 낮게 표현되어 있다. 사각형의 넓적한 얼굴과 오뚝한 콧날, 넓적한 콧망울, 굳게 다문 입 등은 조선후기 17세기 불상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수인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을 마주 잡고 있는데, 이러한 형상은 일반적인 석가여래상이나 아미타여래상의 모습과는 다른 것이어서 구분하기가 어렵다. 신체는 안정감이 있고 균형 잡힌 불신을 보여주며, 양어깨에 걸친 통견의 법의가 양쪽 팔에 걸쳐서 결가부좌한 무릎 아래까지 흘러내리고 있다. 가슴 가운데에서 무릎까지 넓은 군의와 군의대가 있고 주름지듯 겹쳐진 옷자락도 눈에 띈다.

  • 익산시 함라면에 있는 오래된 전통 가옥

    이배원가옥

    한옥마을에 자리 잡고 있는 오래된 전통 가옥으로 인근에 조해영가옥과 김안균가옥이 있어 토석 담장과 한옥 기와지붕 등이 어우러져 전통적 경관을 유지하고 있다.

    소재지전북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 411-1

    문의처063-859-5785

    • 문화재구분지방지정 문화재
    • 문화재지정번호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37호

    이배원가옥은 전라북도 익산시 함라면에 있는 오래된 전통 가옥으로 2002년 12월 14일에 익산시 향토유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한옥마을에 자리 잡고 있는 오래된 전통 가옥으로 인근에 조해영가옥과 김안균가옥이 있어 토석 담장과 한옥 기와지붕 등이 어우러져 전통적 경관을 유지하고 있다.

    이배원이 1917년 지은 가옥으로 함라 삼부잣집 중 가장 먼저 지어져 조해영 가옥과 김안균 가옥의 본보기가 되었다. 건립 당시에는 안채, 사랑채를 비롯하여 이 집안의 부를 이뤘던 조부(이배원)가 생활하던 초가가 있었고, 뒤뜰에는 창고·헛간·축사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토석담장만이 남아 있으며, 사랑채는 내부가 완전히 개조되었다. 안채는‘ㄱ’자형 집으로 가구는 일고주오량가(一高柱五梁家)로 고주 중간에 대들보를 끼우고 고주 머리가 직접 마룻보와 중도리를 받치게 했다. 기단은 장대석을 이용하였으며 초석과 기둥은 방형으로 사용했다.

  • 평지에 있는 절, 남원사

    남원사 미륵전

    조선 선조(宣祖) 연간에 남원부사가 부임하는 도중 이곳에서 묵어가게 되었는데, 꿈에 석불이 나타나 무엇인가 부탁을 하였다. 이상히 여겨 다음날 그 자리를 파 보니 석련대(石蓮臺)와 미륵불상 및 5층석탑이 나오므로 법당을 중창하고 남원사라 하였다 한다.

    소재지전북 익산시 여산면 제남리 224

    문의처063-836-5344

    • 문화재구분지방지정 문화재
    • 문화재지정번호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88호

    평지에 있는 절, 남원사

    남원사는 여산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떨어져 논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신라 흥덕왕(興德王) 6년(831)에 진감국사(眞鑑國師)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처음에는 수십 동의 건물이 있는 대사찰로 법당사(法堂寺)라 하였는데, 그 후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 훼손되어 폐사가 되었다. 조선 선조(宣祖) 연간에 남원부사가 부임하는 도중 이곳에서 묵어가게 되었는데, 꿈에 석불이 나타나 무엇인가 부탁을 하였다. 이상히 여겨 다음날 그 자리를 파 보니 석련대(石蓮臺)와 미륵불상 및 5층석탑이 나오므로 법당을 중창하고 남원사라 하였다 한다. 경내에는 미륵전과 종각, 요사(寮舍)가 있다.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88호 남원사 미륵전

    미륵전(彌勒殿)은 말세에 나타나 석가모니가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모두 구제한다는 미륵불을 모신 전각이다. 지붕 양측에 방풍판을 달고 간략화한 공포는 장식을 아꼈으며, 기둥은 두리기둥이다. 낮은 기단 위에 덤벙초석을 놓고 지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주심포집으로 전면은 이중처마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여느 법당과는 달리 정면의 각 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가운데에만 중간에 창방을 얹고 두 짝씩의 여닫이문을 해 달았다. 조선시대 건물로 단아한 모습이 일반 가옥의 사묘와 흡사하다. 미륵전 앞에는 5층석탑이 세워져 있으나 전체적으로 파괴가 심해서 원형을 잃고 있다. 지대석도 없고 탑신도 1층뿐으로 2층과 3층 탑신은 자연석을 올려놓아 기이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4층과 5층 탑신은 둥근 부도(浮屠) 모양의 탑신이고, 상륜부는 전혀 없다. 미륵전 안에는 석불좌상(石佛坐像)이 방형대좌에 결가부좌하고 있는데 결실되었던 것을 보수하여 안치하였다. 대좌는 하대와 중대만이 남아 있는데 하대석은 중앙에 복판연화(覆瓣蓮花)를 놓고 좌우에 다시 복판연화를 하나씩 조식하고 좌우의 모서리 부분에는 복판연화의 중앙선을 축으로 연판을 배치하였다. 하대의 상면에는 중대를 받치는 3단의 받침이 있는데 제1단은 낮은 각형 받침이고 2단과 3단은 곡형을 한 받침이다. 방형의 중대석은 각면에 안상(眼象)을 두었는데 고사리무늬와 꽃봉우리무늬를 넣어 아름답게 꾸미고 있다. 좌대의 형태는 대체로 고려 중기의 양식을 나타낸다고 한다.

  • 미륵산 기슭의 장암마을 위쪽에 자리한 심곡사

    심곡사 대웅전

    심곡사는 미륵산 기슭의 장암마을 위쪽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의 말사이다. 대웅전 안에는 현재 문화재자료 제152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목조삼존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소재지전북 익산시 낭산면 낭산리 176

    문의처063-855-2001

    • 문화재구분지방지정 문화재
    • 문화재지정번호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87호

    미륵산 기슭의 장암마을 위쪽에 자리한 심곡사

    심곡사는 미륵산 기슭의 장암마을 위쪽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의 말사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 문성왕(839~856) 때 창건됐다고 하나 이를 뒷받침할만한 유적이나 유물은 없다. 그 뒤 19세기에 중건되었으며, 지금의 사찰은 100여년 전 현 위치에서 200m쯤 떨어진 산등성이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근래에 들어와 대웅전을 해체 중건하고 요사를 새로 짓는 등 중창불사가 이루어졌다. 심곡사는 동향하고 있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삼성각, 왼쪽에 명부전을 두고 있으며. 대웅전 앞에는 칠층석탑 1기가 자리한다. 그리고 명부전 뒤쪽에 요사가 있고, 사찰에 오르는 입구에 부도전이 있다.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87호 심곡사 대웅전

    이전에 있던 대웅전은 1819년(순조 19)에 만든 앞면 3칸, 옆면 2칸에 맞배지붕의 겹처마를 한 건물이었으나, 1986년에 헐고 지금의 대웅전을 새로 지었다. 크기는 앞면 5칸, 옆면 3칸으로 앞쪽의 기단은 이중 형태이며, 아래 단에 있는 석재는 잘 가공된 장대석이고, 다른 곳에서 사용하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건물은 이익공 형식이고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2분합문이 각 칸에 설치되어 있다. 대웅전 안에는 현재 문화재자료 제152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목조삼존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삼존불은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에 지장보살(地藏菩薩)과 관음보살(觀音菩薩)을 각각 모셨는데, 조선시대 양식이기는 하나 제작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이 외에도 삼존상 뒷면에 아미타후불탱화와 영산회상도, 지장보살후불탱화가 모셔져 있다.

    유 래
    2012년 6월 석탑의 해체 수리시, 지대석 윗면에 마련된 사각형의 홈(25.0×24.0㎝, 깊이18.0㎝)에서 발견됨. 불감은 밑판, 좌우측면판, 뒤판, 뚜껑 등이 각각 1판으로 제작되었고, 문비만 2판으로 제작됨. 뚜껑은 지붕의 네면의 모를 죽인 녹정형(盝頂形)으로 정상에는 2개의 고리가 달려 있음. 감실내면 중앙벽면에는 타출기법으로 아미타여래설법도를 나타내었고, 문비에는 역동적인 금강역사를 배치함 7구의 불상은 불감의 앞쪽에서 아미타여래와 관음·대세지보살상이, 뒤쪽에서 2구의 여래와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발견됨. 대체로 높은 육계, 큼직한 연봉모양의 정상계주, 잘록한 허리와 육감적인 신체표현과 감각적인 세부표현, 삼각형 모양으로 仰·覆蓮이 맞닿는 연화좌, 원반모양의 귀고리, U자형으로 두껍게 늘어진 목걸이 등을 보이고 있ㅇ는 이는 이 시기에 크게 유행했던 원·명대 라마불교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여말선초기 소형불상들과 양식적으로 상통하는 요소임. 따라서 이들 불상을 통해 여말선초기 원·명대 외래양식의 전래와 수용과정을 살필 수 있어 더 할 나위 없이 중요하며, 또한 분명한 출토지에 7구의 불상이 모두 한 불감 내 온전한 형태로 발견되어 가치 높음

게시물 검색